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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다녀온곳들

경복궁의 원래 모습

경복궁 구경할때 가끔 느꼈던 것이 임금님이 사는 궁궐인데 일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을텐데 너무 건물이 작아서 다들 어디서 살았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답을 찾았네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이 강제로 많이 철거해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며, 조선의 정궁이기도 하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소재. 조선의 법궁이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인데 <시경>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 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 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도 모두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다.

다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서 정도전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도전이 경복궁에 개입한 것은 위치 잡는데 왈가왈부한 것과 건물에 이름 붙인 것 뿐이다. 경복궁 건설을 위해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립되었고, 그 책임자로는 조선건국공신이었던 심덕부가 임명된다. 심덕부는 고려시대에 문무 모두에 이름이 있고, 최무선의 화포도 운용해 봤고, 이성계의 9 공신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라고 하는게 더 알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복궁 건축을 한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환관 김사행(金師幸)이다. 김사행은 원래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 환관으로 차출된다. 그런데 김사행이 원나라 환관으로 있으면 있었던 곳이 원의 궁궐 수리를 담당했던 관청 전연사(典涓司)였다. 이후 김사행은 노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오면서 같이 고려 땅을 밟게 되는데, 이후 최고의 건축전문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서 환관을 총감독하는 판내시부사까지 오른다. 이후 김사행은 공민왕릉과 노국대장공주릉의 건설을 주도했고, 이는 이후 조선왕릉의 기본이 된다. 경복궁 건설에 김사행이 차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진사대부가 지은 궁궐이기 때문에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다. 다만, 현재의 경복궁은 과거의 경복궁과 차이가 있고, 이전 국가들의 궁궐도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으며, 실질적 건축 책임자인 김사행이 원나라 황실 건축에서 배웠고, 고려에서는 사원 건축 전문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 경복궁이 유교이념을 반영해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서원 건축도 불교 사찰건축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조선 건축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규모가 작았던 것은 목재의 부족 때문으로 추정될 정도라서. 무엇보다 조선왕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 같은 경우 경복궁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고, 경복궁에서 초기에 사용했다는 청기와도 회암사 터에서 발견된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 금지로 묶인 채 20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 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래 각주에서도 언급되지만,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달리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3호선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광화문 안쪽이다. 그리고 3호선 안국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그 유명한 인사동 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