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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구니/세계명화들

빈센트 반 고흐의 미술 작품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박물관을 직접 갔다와서 그의 미술 작품에 관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예전에 갈무리해둔 글과 그림들이 있어서 제 블로그에 올려 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 Van Gogh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산이 드문 나라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까마득한 지평선 끝까지 파란 논밭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집과 풍차와 숲이 흩어져 있고, 강물이 은빛 띠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제 그런 지평선 끝에 빨갛게 타는 저녁해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조용히 가라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저것좀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풀밭에서 공차기를 하며 놀고있던 대여섯명의 어린이 중 한 아이가 외쳤다.
  “어쩌면 저녁 해가 저렇게 빨갈까?”
  공기가 맑은 탓인지 오늘따라 저녁해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였다.
  어린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피보다 더 빨갛지?”
  그러자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저녁해를 바라보고 있던 한 아이가,
  “틀려, 저건 빨강빛이 아니고 노랑빛이야.”  하고 나섰다.
  “뭐? 노랑 빛깔이라고? 네 눈엔 저게 노랗게 보이니?”
  여러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보이는 게 다 뭐냐? 정말 빛깔이 노랑인데...”
  “뭐라고? 저건 누가보든지 빨강빛깔이야.  그렇지 얘들아?”
  “응, 그렇고 말고. 저건 빨강이야.”
  어린이들은 모두 빨강 빛깔이라고 말했다.
  “네 눈이 좀 이상한 모양이구나.”
  “이상한건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정말 빛깔을 보지 못하고 있어.”
  저녁해를 노랑빛깔이라고 우겨대는 그 어린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이가 바로 뒷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들어가는말 
빈센트 반 고흐..지금에서야 이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평생동안 빈센트 반 고흐는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1890년에 37세의 나이로 고흐가 죽었을 때,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고흐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1987년 에 그의 작품<해바라기>는 런던에서 2,5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파렸다. 반 고흐 의 그림은 색채가 뚜렷하고 대담하고 열정적이며, 100년 전의 작품임에도 현대적이고 열기 에 넘치는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성장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남부에 있는 조그만 마을 흐로트 쥔데르트에 서 태어났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존경 받는 중산층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는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은 고흐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에 결정한 일이었다.


1857 : 동생테오,5월1일에 출생.테오는 고흐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로 일생일 지냄

1859년 : 틀라크로아, 코로, 쿠르베, 밀레 등에 의한 근대 회화전이 파리에서 열림.
1861년 : 마을 학교에 입학. 고흐의 소년기의 생활과 모습은 누이동생이 쓴 「회상의 고호」속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1863년 : 살롱 낙선전 열림. 들라크로아 사망, 시냑 출생. 1865년 : 프로빌의 기숙 학교에 입학, 69년까지 다님. 마네,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 물의를 일으킴. 이 때부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 게르보아에 바질, 드가, 세잔 등이 모임. 1867년 : 카페 게르보아의 모임 최성기. 보나르, 바라든 출생. 앵그르, 테오토르 루소 사망.  1869년 : 7월 30일, 헤이그에 있는 구필 상회에 취직, 얼마 후 프류셀의 구필 지점으로 전임. 1872년 : 동생 테오와의 서신 왕래가 시작됨.1873년 : 5월, 구필 상회 런던 지점으로 전임. 동생 테오, 고흐의 전 근무처 구필 상회 브류셀 지점에 취직. 6월, 하숙집 딸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음.1874년 : 10월, 파리에 여행했다가 12월, 런던으로 귀임.
1875년 : 5월, 파리 본점으로 전임. 구필 상회의 점원들 및 고객들과 자주 싸움. 이때부터 성서를 탐독.)

실패한 전도사 
고흐는 종교에 더욱 몰두하게 되어 24세 때에는 마침내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는 네델란드로 돌아와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에서 3년 동안 목사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 시험에 계속 낙제를 하자 고흐는 황량한 탄광 지대로 가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짚풀 위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과 같이 옷을 입었으며, 탄광 안으로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이 일에 너무나 열정을 쏟은 나머지 선배 성직자들의 태도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1879년 7월에는 '품행 불량'을 이유로 전도사의 직위를 잃게 된다.


농부를 그리는 화가 
27세 때 고흐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1880년에서 1885년 까지 꾸준히 그림 실력을 키워 갔다. 그는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네델란드 곳곳에 있는 싸구려 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드렌테라는 황량한 시골에 살며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을 그리 기도 했다. 그는 자주 병에 걸리고 절망에 빠졌지만, 화가로서 성공하리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뇌넨에서 보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풍경․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 Weavers〉과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에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뇌넨의 교회에서 돌아가셨다. 고흐는 이에 충격을 받지만 화가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은 한층 굳어졌다. 그의 첫 번째 걸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고흐가 배웠던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후 6월 <농부의 얼굴>을 제작하였다.  그 해 말경에 고흐는 앤트워프와 파리의 화가들이 보여 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나게 된다.  루벤스와의 만남에서 일본의 판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파리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고흐는 파리에 온 뒤 그림 상인이 된 동생 테오와 함께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서 2년동안 살았다. 당시 프랑스 미술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흐는 테오를 통해 새로운 '인상주의'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화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두운 북부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 온 고흐에게 이들이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또한 테오는 호우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조르주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르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일본의 영향
고흐는 파리 생활과 인상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있었다. 평생 동안 고흐는 새로운 생각과 기법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작업에 응용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는 일본 판화가 고흐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쳐 그의 그림에 색채와 생기를 더욱 불어넣었다. 고흐는 그런 일본 판화를 400점 가량 모았는데, 1887년 봄에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는 카페 주인이 그가 모은 판화로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고흐는 파리 체재 중에 정물화, 몽마르트르 풍경등 200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름, <레스토랑의 내부>를 제작하였다.


단순함 위대함 
1888년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 Portrait of Pere Tanguy〉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Self-Portrait in Front of an Easel〉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탕기 영감의 초상>


아를 
1888년 여름에 고흐는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비롯한 많은 걸작들을 그려 냈다. 그는 자주 정신을 잃었고 또 위장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후 12개월 동안(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고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은 붉은 머리에 쉰 목소리가 나는 이 네델란드 화가를 이상 하게 여겼다. 고흐는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꼈다. 그는 남부 지방의 풍경과 빛과 평온 을 좋아해서, 봄 꽃이 가득 핀 들이나 과수원으로 나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곤 했다. 이때, <꽃이 핀 아몬드  나무의 가지들, 모브의 회상>을 제작하였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노란집 
1888년 여름에 고흐는 아를에 있는 플라스 라마르틴이라는 집의 한쪽에 세를 들었다. 그 집은 노란 칠이 되어 있었고 실내에는 작업하기 좋게 햇빛이 잘 들었다. 고흐는 이 집을 화가들이 교제 장소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집 안팎을 꾸몄다. 그리하여 이 집은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고흐를 상징하게 되었다.


정신병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Garden of the Asylum〉<삼나무 Cypresses〉․〈올리브 나무 Olive Trees〉․〈알피유 가족 Les Alpilles〉,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들라크루아․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피에타 (들라크루아 모작)

다시 북부로..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붉은 포도밭>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이다.1890년 5월에 고흐는 생 레미 정신 병원을 떠나 파리로 갔다. 고흐는 북부로 가고 싶어져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갔다. 폴 가셰 박사가 고흐를 돌봐 주었다. 가셰 박사는 정신과 의사로 그 자신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7월 1일, 파리에 수일동안 체재하면서 로트렉 등과 재회.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을 제작하였다.


끝 그리고 시작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베르로 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오베르에서 두 달을 보낸 후 고흐는 완전히 기운을 잃고 말았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들에 나가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틀 후에 고흐는 테오의 품 안 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1872년부터 테오와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수시로 달라지는 건강상태와 정신상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위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전기자료이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1962년 :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
1973년 : 6월2일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된지 13년 만인 1973년 암스테르담에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바로 옆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슈테데릭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왔다.

그의 생전 작품 유화 8 백 70 여점, 드로잉 1천 2백여점 중 유화 2 백여점, 드로잉 5백 50점을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각 시대별로 고루 수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



고흐이 작품들을 감상하시겠습니다. 스크롤 압박이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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